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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자들의 명언

늘~ 푸른 2011. 11. 11. 21:56

 

대한민국 부자들의 명언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명언입니다.

과연 당대를 살고있거나 살다간.. 부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부자가됐을까요?

거상 임상옥이 70歲가 되어 한 말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

재물은 평등하길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재물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일시적으로 가둘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은 단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입니다. 물은 그저 흐를 뿐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손 안에 들어온 재물은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도 그는 잠깐 현세에서 귀한 명예를 빌려 비단옷을 입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비단옷을 벗어 버리면 그도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저울처럼 바른 것입니다.

임상옥(林尙沃, 1779년 ~ 1855년)은 조선의 무역 상인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경약, 호는 가포이다. 정조 때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이 때부터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가포집〉,〈적중일기(寂中日記)〉등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 백산상회, 최준 창업주(오른쪽)

 

 


‘부자란 어떠해야 하는가’ 깨달음을 주는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부잣집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흉년 때 곡식 창고를 개방하다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 자에게는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 가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비록 이 집안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 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평가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삼성 이병철 회장

 

 

1930년대, 대구 삼성상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쓰지말 것이며, 내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은 끝까지 믿고 밀어주거라


이병철(李秉喆, 1910년 2월 12일 ~ 1987년 1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삼성그룹의 창립자이다.
경남 의령 출신으로 호는 호암(湖巖)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였다가 1934년 중퇴하였고, 1982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8년 3만 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현 인교동)에 '三星商會(삼성상회)' 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년 ~ 1954년 제일제당(현 CJ)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회장을 역임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

 

 


 

본전 생각을 하지 말라, 손해가 이익을 끌고 온다



이건희(李健熙, 1942년 1월 9일 ~ )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삼성전자의 회장이다.

LG창업주 구인회

 

 


 

한번 사람을 믿으면 모든걸 맡겨라


구인회(具仁會, 1907년 8월 27일~1969년 12월 31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LG그룹의 창립자로 전자 화학산업의 선구자로 불린다. 호는 연암(蓮庵)이다.

본관은 능성, 호는 연암으로 경남 진주시 출신이다.

1926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2년 수료하고 귀향해 지수협동조합의 이사로 취임하였는데 이것이 사업가로서의 첫 출발이다.

이후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3년 만석군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고 1947년 크림 생산도 시작하였고

1953년 성공하여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9년에는 금성사를 창립해 라디오 생산도 시작하였고 이어 전화기, 선풍기 등을 생산하였고

금성사도 치약, 칫솔, 비누 등을 연이어 생산하였다.

한편으로는 부산 국제신보 사장이 되었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지냈다.

사회 활동에도 주력해 1968년 회갑 기념으로 진주에 연암 도서관을 세웠고 1969년 연암문화재단을 창설하였으나, 문화재단 창설 한 달 만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그의 뜻을 받들어 금성기업에서는 학자 및 학술지원에 기여한 사회저명인사들을 포상, 장려금 등을 지원하였다.


LG 명예회장 구자경

 

 


 

나는 한 사람의 뛰어난 머리보다 열 사람의 지혜를 더 중시한다.


 

 

구자경(具滋暻, 1925년 4월 24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호는 상남(上南)이다.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구인회(具仁會) 창업회장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5년간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0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에 이사로 합류했다. 현재는 천안에 있는 한 농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1970년 ~ 1995년 럭키금성그룹 회장에 취임하여 당시 매출 260억원이었던 그룹을 30조원 규모로 키웠다.

1972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80년 ~ , 고려중앙학원 이사, 1983년 ~ , 동아일보사 이사, 1993년 3월 ~, 동아일보사 이사, 1994년 보람은행 이사회장,

1995년 1월 럭키금성 그룹의 명칭을 LG그룹으로 바꾸면서 첫째 아들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스스로 물러났다. 1995년 2월부터 LG그룹 명예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해보긴 해봤어?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 2001년 3월 21일)은 한국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호는 아산(峨山)이며,

현대그룹의 창업자 겸 명예회장이며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에 편승하여 건설사업을 추진,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하였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권을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 회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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